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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분류:루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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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include(틀:루이나의 민주화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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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tablewidth=443><tablealign=right><tablebgcolor=#fff,#191919><tablebordercolor=#a0ccff,#005ba6><bgcolor=#29166f> {{{#fff {{{+1 '''10.24 시민혁명'''}}}[br]十二四 市民革命 · 10.24 Civil Revoluti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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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1980년 10월 24일([age(1980-10-24)]주년)[* 시위는 3월부터 있었다. 그러나 전국적으로, 동시다발적으로 확산된 것은 10월 10일부터이다.] ~ 10월 26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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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bgcolor=#29166f> {{{#fff '''장소'''}}} ||
10||<-2> 루이나 전역 ||
11||<-2><bgcolor=#29166f> {{{#fff '''원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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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 알렉산더 모로 군정의 폭압 통치와 정치 일정 무기한 연기[br][[루이나 여중생 고문강간치사사건]] 발생[br]에드먼드 조이 최루탄 피격 사건 및 나보레 초등학생 총격 사망 사건[* 시위가 전국적으로 퍼진 원인이다.] 등 ||
13||<bgcolor=#29166f> {{{#fff '''목적'''}}} ||군정 종식, 헌정 회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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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bgcolor=#29166f> {{{#fff '''참여 인원'''}}} ||600만~700만 명 추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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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bgcolor=#29166f> {{{#fff '''시위 당사자'''}}} ||루이나 국민[br]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br]시민혁명군 총지휘부 ||
16||<bgcolor=#29166f> {{{#fff '''주요 인물'''}}} ||국가비상위원회 위원장 [[알렉산더 모로]][br]공군 소장 베르나르 그레몽[br]민주연합 총재 [[리처드 앨런 베인브리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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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bgcolor=#29166f> {{{#fff '''결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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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 [[국가비상위원회]] 해체, 군정 종식[br]알렉산더 모로 사망, 임시정부 수립[br][[벨포르의 봄]]을 거쳐 [[제4공화국(루이나)|제4공화국]] 출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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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개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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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24 시민혁명(十二四 市民革命, 10.24 Civil Revolution)은 1980년 10월 24일부터 26일까지 루이나 전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대규모 민중 항쟁이다. 1978년 [[10.10 군사반란]]으로 들어선 [[국가비상위원회]]의 군정을 무너뜨리고 2년 만에 헌정을 회복시킨 결정적 사건으로, 루이나 현대사에서 가장 상징적인 시민운동이자 오늘날까지도 '두 번째 1885년'으로 불릴 만큼 정치·사회적으로 중요한 전환점으로 평가된다.
24
25시위는 3월부터 이어졌고 10월 10일부터 전국으로 번졌으나, 시민들이 무장 봉기로 군정의 심장부를 직접 겨눈 것은 10월 24일부터였다. 26일 새벽 시민군과 군 이탈 병력이 대통령궁에 진입해 국가비상위원회 위원장 [[알렉산더 모로]]를 체포했고, 모로는 연행 도중 총격으로 사망했다. 같은 날 저녁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26
27혁명 이후의 이행기는 [[벨포르의 봄]]으로 불린다. 그러나 이행기의 주도권은 거리의 시민위원회가 아니라 혁명에 가장 늦게 합류한 [[리처드 앨런 베인브리지]]의 [[민주연합(루이나)|민주연합]]에 돌아갔고, 그가 이끈 [[제4공화국(루이나)|제4공화국]]과 제5공화국은 다시 권위주의로 기울었다. 10.24가 세운 헌정이 온전히 자리 잡은 것은 1989년 [[루이나 헌정 위기|헌정 위기]]를 거친 뒤였다.
28
29== 명칭 ==
30명칭은 전면 무장 봉기가 시작된 10월 24일에서 왔다. 3월부터 이어진 시위 전체를 가리킬 때도 이 이름을 쓰지만, 좁게는 24일부터 26일까지의 사흘을 뜻한다.
31
32군정의 마지막 공식 발표는 이 사건을 「10월 폭동」으로 불렀다. 제4공화국은 자신의 정통성을 이 사건에서 찾았기 때문에 출범과 동시에 「10.24 시민혁명」을 공식 명칭으로 삼았다. 같은 시기 [[10.10 군사반란]]의 공식 표기가 「10.10 사태」라는 중립적 명칭에 머문 것과 대비된다. 혁명은 혁명이라 불렀으나, 반란은 반란이라 부르지 못한 것이다.
33
34'두 번째 1885년'이라는 별칭은 1885년 [[벨포르 추대회의]]가 왕을 세울 권한을 확인한 뒤 바로 그 권한으로 왕위를 폐지했던 일에 빗댄 것이다. 주권이 어디에 있는지를 시민이 다시 한 번 스스로 확인했다는 뜻이다.
35
36== 배경 ==
37=== 10.10 군사반란과 12.6 사태 ===
381978년 10월 10일 육군 참모차장 [[비달 파브르]] 중장을 중심으로 한 군부가 [[10.10 군사반란]]을 일으켜 수도를 장악했다. 리처드 잭슨 대통령은 그달 말 하야했고, 파브르가 위원장을 맡은 [[국가비상위원회]]가 의회를 해산하고 정당 활동과 언론 자유를 정지시키면서 29년간 이어진 제3공화국이 무너졌다.
39
40파브르의 통치는 58일 만에 끝났다. 1978년 12월 6일 반란의 실질적 설계자였던 부위원장 필립 갤러거 중장이 벨포르 대통령궁에서 파브르를 사살한 [[12.6 사태]]가 일어난 것이다. 갤러거는 그날 밤 계엄사령관 알렉산더 모로 중장이 지휘한 병력에 체포되었고, 비공개 군사재판을 거쳐 1980년 1월 총살되었다.
41
42=== 모로 체제 ===
43갤러거를 진압한 모로는 그달 하순 국가비상위원회 위원장에 올라 대장으로 진급했다. 모로는 10.10 반란의 핵심 가담자가 아니었다. 당시 육군 제2군 사령관이던 그는 반란 당일 밤 상황을 관망하다 이튿날 반란군 지지를 표명했고, 그 대가로 계엄사령관에 임명되었다. 반란을 설계한 장교 집단과 거리를 둔 강경파였던 그는 위원장에 오른 뒤 합의체였던 위원회를 사실상 1인 체제로 바꾸어 갔다.
44
45모로 체제는 [[검은 10년]]의 무장조직 소탕을 통치의 명분으로 내세웠다. 그러나 군정이 실제로 겨눈 것은 무장조직보다 비판 세력 전반이었다. 정보기관이 국내 사찰에 동원되었고, 1978년 말 단행된 언론 통폐합으로 일간지는 34종에서 14종으로 줄었으며 방송은 국영으로 흡수되었다. 학교에서는 학생회가 해산되고 교련 시간이 두 배로 늘었으며, 비판적 교원 수백 명이 해직되었다. 도시에서는 도시 정비를 명분으로 한 철거와 강제퇴거가 대규모로 이루어졌다. 훗날 드러난 바에 따르면 진보 언론인을 겨냥한 [[스틸워터 계획]]도 국가비상위원회의 서명 아래 계속되었다.
46
471979년 가을 모로는 1981년까지 민정을 이양하겠다는 '정치 일정'을 발표하고, 그 준비 절차로 정당 결성을 제한적으로 허용했다. [[리처드 앨런 베인브리지]]가 [[민주연합(루이나)|민주연합]]을 창당한 것이 이때다. 재야와 학생운동은 등록 심사를 통과한 정당들을 군정이 허락한 야당으로 보았다. 그러나 1980년 4월 국가비상위원회는 "치안이 회복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정치 일정을 무기한 연기했고, 이 결정은 이후 반년간 이어진 저항의 직접적인 기폭제가 되었다.
48
49국제 사회는 대체로 침묵했다. 1978년 12월 [[LSEC]] 이사회가 루이나의 의결권을 정지했으나 [[북랜드해협조약기구(NLTO)|NLTO]]는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고, [[미합중제국]] 역시 군정이 반공과 서방 동맹 유지를 선언한 이상 사태를 방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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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진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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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1980년 상반기 ===
531980년 1월부터 4월까지 루이나 사회는 외견상 평온했지만, 곳곳에서는 이미 체제에 대한 신뢰 붕괴와 정치적 긴장의 조짐이 고조되고 있었다. 군정은 여전히 비상조치 아래 국민을 통제했고, 언론은 국방부 예심국의 사전 검열을 거쳐야 했으며, 각급 학교에는 국가헌신교육 지침이 강제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시기 작고 흩어진 사건들이 누적되며 민심의 균열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54
552월 8일 벨포르 북구 제7고등학교에서는 교장이 정규 수업 도중 학생들에게 "국가는 신을 대신해 정의를 집행한다"고 강의한 뒤, 이에 항의한 17세 학생이 퇴학 조치된 사건이 있었다. 해당 발언은 지역 지식인들 사이에서 회자되며 '국가에 대한 맹종'을 강요한다는 비판 여론으로 번져 갔다. 퇴학당한 학생이 다른 학교의 전학 면접에서 모두 거부당하자, 시민사회 내부에서는 "정권의 비판자에 대한 무언의 보복이 시작됐다"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이 학생이 학생회 해산 뒤 결성된 지하 독서회의 일원이었다는 사실은 혁명 이후에야 알려졌다.
56
573월 초 롱비치 항구노동자 협동조합은 '비공식 요주의 인물 명단'의 존재를 폭로하며 파업에 돌입했다. 조합 측은 특정 노동자들이 이유 없이 해고되거나 병역 심사에서 불이익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내부 회계 문서에서 확인했다고 주장했다. 파업은 곧 진압되었지만 전국의 노동조합 내부에 비슷한 명단에 대한 불안이 퍼졌고, 이는 비밀리에 '조합 간 연대회의'가 구성되는 단초가 되었다. 개별적으로는 합법인 행정 절차를 압박 수단으로 쓰는 이 방식은 훗날 [[스틸워터 계획]]의 수법과 같은 것으로 확인되었다.
58
594월에는 에포르 남부에서 '방역소 전기충격 사건'이 알려졌다. 군 보건사령부가 감염병 확산을 이유로 소도시 주민 20여 명을 강제 수용했고, 이 과정에서 고통을 유발하는 자극 전류를 이용한 통제 방식이 사용되었다는 증언이 흘러나왔다. 보건사령부는 "의료적 절차"라고 해명했지만, 지역 신문 《에포르 저널》이 이를 '인간에 대한 국가 실험'으로 규정했다가 편집장이 경질되었다. 그 뒤부터 언론 종사자 사이에서 자율적 보도 거부와 내부 검열 항의가 이어졌다.
60
61같은 달 하순 국가비상위원회가 정치 일정의 무기한 연기를 발표하자, 흩어져 있던 불만은 처음으로 하나의 요구로 모였다. 거대한 시위나 봉기의 조짐은 아직 보이지 않았으나, 여러 지역과 계층에서 공통적으로 '국가가 더 이상 안전망이 아니라 위협 그 자체'라는 인식이 퍼져 갔다. 이 시기의 작고 파편화된 사건들이 훗날 정의구현사제단의 폭로와 시민 항쟁으로 이어지는 '심리적 분기점'을 형성했다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62
63=== 정의구현사제단의 폭로 ===
641980년 7월 9일, 수도 벨포르의 가톨릭 성직자 및 수도자들로 구성된 시민종교운동 단체 정의구현사제단은 군정이 자행한 정치범 고문과 비인도적 수용 실태를 공개적으로 고발하였다. 이들은 벨포르 대주교좌성당 부속 회관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군정 출범 이후 내부적으로 수집해 온 정보사령부의 비밀 재판·고문 절차, 여성 수용자의 성폭력 피해, 심문 중 사망자에 대한 증언과 문서를 일부 공개하였다.
65
66사제단은 특히 "하느님의 이름으로, 인간의 존엄을 짓밟은 체제와 타협하지 않겠다"는 성명을 통해 모로 정권이 하느님의 정의를 모독하고 있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기자회견 당시 낭독된 문건에는 피해자 실명, 고문 방식, 관련 지휘관 실명까지 포함되어 있었으며, 이는 정권의 신경을 극도로 자극하는 계기가 되었다.
67
68폭로는 사건 직후 벨포르 대학 신학부 학생회와 성 아우구스티노 수도회 청년분회, 의료인 연합회, 교사노조의 지지 선언으로 확산되었고, 군정은 곧바로 사제단 소속 신부 3명을 포고령 및 반체제활동규제법 위반 혐의로 체포하였다. 그러나 이미 이들의 증언은 필사본과 등사 유인물 형태로 전국 각지 성당과 학생 모임에 복제·배포되고 있었으며, 라디오 해적방송을 통해 급속히 퍼져 나갔다.
69
70정의구현사제단의 폭로는 대중에게 정권에 대한 도덕적 환멸을 각인시키는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했다. 특히 사제단의 고발은 기존 정치운동과 달리 종교적 도덕성이라는 신뢰 기반 위에서 이루어진 만큼 정권의 선전과 탄압도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 폭로는 이후 각계각층의 양심 선언과 시국선언을 잇따르게 만들며, 10월 시민혁명으로 나아가는 도덕적 대전환점으로 기록된다.
71
72=== 에드먼드 조이 최루탄 피격 사건 ===
73에드먼드 조이 피격 사건은 1980년 9월 17일 벨포르 국립대학 주변에서 벌어진 시위 도중, 국무부 기동경찰국이 발사한 최루탄에 맞아 20세 대학생 에드먼드 조이(Edmund Joy, 1960~1980)가 사망한 사건이다. 당시 에드먼드는 학내 자치모임이 주도한 '비상계엄 해제 촉구 시위'에 참여하고 있었으며, 직사(直射)로 날아온 최루탄 발사체가 그의 두개골을 강타하면서 중태에 빠졌고 병원 이송 중 사망하였다.
74
75사건은 평화적 시위가 정오 무렵 과잉진압으로 전환되며 발생했다. 시위는 교내의 정권 비판 낭독 행사로 시작되었으나, 기동경찰국 9개 중대가 대학가 주변을 포위하고 살수차와 최루탄 발사기를 동원해 강제 해산을 시도했다. 문제의 발사탄은 표준 사격지침인 '''"40도 이상의 발사각을 확보할 것"'''이라는 규정을 어기고 시위대 상반신을 향해 직사한 것으로 확인되었으며, 이는 후일 사진과 언론사의 필름 기록을 통해 재차 증명되었다.
76
77사건 직후 군정은 "폭력 시위 진압 과정의 우발적 사고"라는 입장을 발표하며 현장 책임자에 대한 문책 없이 사건을 축소하려 했다. 그러나 에드먼드 조이의 죽음은 오히려 전국적인 추모 시위와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9월 19일 벨포르 성 루시아 성당에서 열린 장례미사에는 추산 12만 명이 넘는 인파가 모였으며, 같은 날 루이나 전역 36개 도시에서 촛불시위·묵념행진·학생 철야농성이 동시다발적으로 이어졌다.
78
79에드먼드 조이는 사망 당시 '''"국가는 시민의 목소리를 두려워하지 마라"'''라는 손팻말을 들고 있었으며, 그의 사진은 이후 혁명의 상징으로 널리 쓰였다. 특히 직사 사격을 지시한 현장 지휘관이 징계나 처벌을 받지 않았다는 사실은 정권의 무책임성과 폭력성을 부각시켰고, 사건은 시민혁명 직전 대중의 감정이 임계점을 넘는 결정적 도화선으로 기록된다. 벨포르 시민운동본부는 조이의 죽음 직후 "이제는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응답할 시간"이라며 전면 항쟁을 선언했다.
80
81=== 나보레 초등학생 총격 사망 사건 ===
82나보레 초등학생 총격 사망 사건은 1980년 10월 8일 나보레에서 11세 초등학생 레미 바슐레(Rémy Bachelet, 1969~1980)가 귀가 도중 계엄 진압 병력이 발사한 총탄에 맞아 사망한 사건이다.
83
84나보레는 벨포르로 출퇴근하는 노동자들이 모여 사는 베드타운이다. 이날 나보레 중앙역 앞 광장에서는 벨포르 공업지대로 통근하는 노동자들이 비공인 노동조합의 주도로 출근 거부 집회를 열고 있었다. 만성적인 인력난에 시달리던 [[나보레 경찰국]]을 대신해 계엄사령부의 지휘를 받는 기동경찰국 병력이 실탄을 장전한 채 투입되었다. 레미는 방과 후 역 인근 공공임대 단지의 집으로 돌아가던 중이었고, 집회 현장과 무관한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교차로 근처에서 시위대와 무관한 방향으로 달리던 레미를 향해 경고 사격이 아닌 직접 사격이 이루어졌다는 정황이 다수 목격자에 의해 증언되었고, 부검 결과 좌측 흉부 관통에 따른 즉사로 확인되었다.
85
86군정은 초기 발표에서 "시위대에 가담한 청소년이 진압 병력과 충돌하던 중 발생한 사고"라고 주장했으나, 학적부와 교사 증언을 통해 레미가 초등학교 5학년생이며 집회 현장에 접근한 적조차 없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여론은 폭발적으로 악화되었다. 특히 그의 교복 위에 '''‘내가 뭘 잘못했나요?’'''라는 문구가 붙은 유족의 항의 사진은 각종 전단과 해적방송을 통해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며칠 사이 루이나 각지에서 자발적인 학교 단위의 등교 거부 운동이 번져 나갔다.
87
88이 사건은 에드먼드 조이 피격 사건에 이어 일반 시민, 특히 무고한 아동까지 정권이 폭력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인식을 결정적으로 각인시켰고, 나보레 교원노조와 학부모연대가 공동으로 시국선언을 발표하면서 정권에 대한 도덕적 지지 기반은 사실상 붕괴되었다. 10월 10일 루이나 전국교직원총연합은 레미 바슐레의 죽음을 '''"민중 봉기의 임계점"'''이라 선언하며 전국적 수업 거부를 결의했다.
89
90=== 10월 10일, 전국 봉기 ===
911980년 10월 10일은 10.10 군사반란 2주년이었다. 국가비상위원회는 이날을 「구국거사 2주년」으로 기념하는 관제 행사를 벨포르 시청 광장에서 열 계획이었으나, 같은 광장을 먼저 메운 것은 시위대였다. 이날 루이나 전역에서 전례 없는 규모의 동시다발 시위가 일어나며 10.24 시민혁명은 본격적인 궤도에 진입했다. 이는 이틀 전 나보레에서 일어난 레미 바슐레 사망 사건을 계기로 축적된 분노가 폭발한 결과였으며, 단일 사건에 대한 항의가 아니라 체제 그 자체를 부정하는 전면적인 정치 투쟁으로 방향을 전환한 순간이었다.
92
93이날 오전 벨포르에서는 학생·교직원·노동자·성직자 단체가 각기 다른 경로로 시청 앞 광장에 집결하였고, 오후 1시경 시위 인원은 약 21만 명에 달했다. 대부분은 등교와 출근을 거부하고 거리로 나왔으며, 각 단체는 흰 천에 직접 손으로 쓴 구호를 들고 있었다. "더 이상 명령에 복종하지 않겠다", "헌법을 되돌려 달라", "총칼보다 투표함을!" 등의 구호는 분명히 체제 전환을 요구하는 메시지였고, 희생자 개개인에 대한 애도보다 정치적 책임을 묻고 군정 종식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시위의 핵심을 이루었다. 학생회를 해산당한 고등학생들도 교복 차림으로 대거 광장에 나왔다. 교복을 입은 고등학생들이 광장을 메운 사진은 이 혁명을 상징하는 장면 가운데 하나로 남아 있다.
94
95비슷한 시각 오보레와 크레테, 나보레, 롱비치, 콜마르, 사보레, 에포르 등지에서도 각각 수천에서 수만 명에 이르는 시민이 도심으로 몰려나왔다. 노동조합들은 오전부터 전면 파업에 돌입했으며, 일부 공장에서는 노동자 평의회가 형성되어 현장 통제를 넘겨받는 사례도 나타났다. 각 지역 시청 앞에는 시위대가 모여 '국민 자치 선포식'을 열었으며, 일부 청년 단체는 자신들의 시위를 '''‘임시시민의회’'''로 명명했다.
96
97군정은 이날 오전부터 대비에 나섰지만 경찰력은 시위 규모를 감당하지 못했고, 일부 지역에서는 기동경찰국 중대가 시위대를 향한 발포 명령을 거부하거나 대열에서 이탈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특히 수도 방면의 보병 제4사단은 장비를 해제한 채 병영에 머물며 사실상 출동 명령을 거부했고, 그 내부에서는 "민중을 향해 총을 들 수 없다"는 장교 성명이 회람된 것으로 알려졌다.
98
99한편 국영으로 흡수된 [[루이나 방송공사]](RBC)는 이날 오전과 오후 두 차례에 걸쳐 "국가 전복을 기도하는 무허가 불법시위가 벌어지고 있다"며 강경 대응을 예고했으나, 이는 오히려 시민들의 분노를 더욱 자극했다. 같은 날 오후 5시경 벨포르 시내 전광판에는 "오늘의 외침은 내일의 헌법이 된다"는 문구가 등장했고, 이 문구는 전단과 벽보, 해적방송을 통해 전국으로 퍼져 나가며 시위대의 상징적 구호로 자리 잡았다.
100
101=== [[벨포르성당|벨포르 대성당]] 항쟁 ===
102벨포르 대성당 항쟁은 1980년 10월 14일 국가비상위원회가 벨포르 도심에 계엄군을 투입해 시위대 수천 명을 벨포르 대성당(Saint-Rémi Cathedral) 안으로 몰아넣고 포위한 데 맞서 일어난 시민들의 집단 저항이다. 이 항쟁은 포위된 성당 안에서 자발적으로 조직된 비폭력 저항운동이었으며, 이후 10.24 시민혁명에서 종교와 공동체가 수행한 상징적 투쟁의 중심축으로 평가받는다.
103
104당시 군정은 벨포르 시내의 대규모 시위를 "도시 반란의 전조"로 규정하고, 진압을 명분으로 시위대를 도심 외곽이 아닌 대성당 방향으로 의도적으로 유도했다. 이 과정에서 시위에 참여하지 않았던 학생, 상인, 관광객, 성당 주변 상가 종업원과 노인들까지 대열에 휘말려 성당 안으로 밀려들었고, 오후 4시경 성당 내부에는 약 8,000명이 포위·구금된 상태가 되었다. 이 가운데 적어도 2,000명 이상은 시위와 무관한 일반 시민이었음이 후일 확인되었다.
105
106성당 내부에는 물과 식량, 의료물자가 전무했으며, 계엄군은 인도적 지원조차 차단한 채 성당 외곽을 중무장 병력과 장갑차로 포위하였다. 대주교좌본당 사제단과 자원 간호사들이 자발적으로 내부 구호 체계와 질서를 유지하기 시작했고, 이 과정에서 구성된 '''‘벨포르 시민구명위원회’'''는 포위 상황을 외부에 알리기 위해 성당 종탑에서 자체 전단을 뿌리고 음성 송출을 시작했다.
107
108이에 대해 계엄군은 성당 안으로 조명탄과 최루탄을 발사하며 항복을 종용했고, 일부 병사는 성당 문을 부수려는 시도를 벌이기도 했다.
109
110성당 안의 시민들은 15일 오전 회의를 거쳐 '''"우리는 체포된 것이 아니라 피신한 것이다"'''라는 입장을 외부에 발표했고, 이 선언문은 벨포르 신학부 학생들에 의해 손글씨로 복제되어 시내 전역에 배포되었다. 이어 "정의는 교황보다, 민중의 발 아래 있다", "우리는 여전히 공민이다", "신도 총칼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구호가 성당 벽면에 적히며, 내부 분위기는 명백한 정치 저항의 성격으로 굳어졌다.
111
11216일 새벽 고열과 탈수로 쓰러진 노인 환자에 대한 외부 의료진의 출입 요청이 거부되자, 일부 시민이 성가대석을 점거하고 단식 투쟁에 들어갔다. 성직자와 학생, 여성 시민들까지 동참한 이 단식 투쟁은 항쟁의 상징으로 부각되었고, 수도원 연합과 시민단체들은 이를 전후해 '''"계엄은 끝났다. 이제 진실이 싸운다"'''는 구호로 전국 시위 연대를 호소했다.
113
114결국 군정은 안팎의 압박 속에 16일 저녁 병력 철수를 결정했다.
r4
115
116벨포르 대성당 정문에는 이후 시민단체 주도로 다음과 같은 비문이 새겨졌다.
117
118> “우리를 가둔 자들은 철을 믿었고, 우리는 진실을 믿었다.”
r11
119
120=== 무장 저항의 확산 ===
12110월 16일 밤 대성당을 포위하고 있던 계엄군이 철수하며 시민들이 밖으로 나왔지만, 광장의 침묵은 곧 분노로 바뀌었다. 군정은 포위 해제에 대해 어떤 사과도, 해명도 내놓지 않았다. 공식 발표는 단 두 줄이었다. "상황은 종료되었으며, 대성당 내 모든 시민은 안전하다." 사망자가 있었고 병력의 폭력과 인권침해는 명백했지만, 군정은 이를 끝까지 인정하지 않았다. 많은 시민들은 이 발표를 "우리의 고통과 분노는 정부에게 아무 의미가 없다"는 선언으로 받아들였다.
122
123대성당을 빠져나온 시민들은 육체적으로는 탈진했지만 흩어지지 않았다. 성당 안에서 형성된 연대의식, '우리가 함께 버텼다'는 경험은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다. 몇몇 시위자들은 즉석에서 "대성당을 감옥으로 만든 자들에게 더 이상 맨몸으로 맞설 수 없다"고 외쳤고, 이 발언은 현장에 있던 노동자, 학생, 간호사, 교사들 사이에서 빠르게 공감대를 얻었다. "비폭력은 도덕의 고지지만, 방패 없는 자를 치는 주먹 앞에서는 무력하다"는 말은 이후 시민방위조의 선언문에 그대로 인용되었다.
124
125이튿날인 17일, 벨포르 중심가의 민간 철공소 「르베르제 작업장」에서는 밤사이 금속노조 소속 기술자 13명이 제작한 철제 곤봉과 방패 240개가 시민조직에 제공되었다. 이는 벨포르 시내에서 처음 등장한 조직적인 자위 장비였다. 같은 날 오후 벨포르 북서부 보급창에서 군용 탄약 수송 트럭 한 대가 정체불명의 시민 무리에 의해 탈취당했다는 소식이 돌았고, 밤사이 「시민 무장 자위대」라는 이름의 전단이 처음으로 나돌기 시작했다.
126
127중요한 전환점은 롱비치에서 찾아왔다. 17일 저녁 롱비치 해군기지 내 제8훈련보급연대 소속 후방병기반 상사와 중사급 부사관 몇 명이 무기고 문을 열고 M16 소총과 탄약, 수통, 전술통신 장비 등을 인근 조선소 시위대에게 넘겼다. 이들은 "더 이상 명령을 따를 수 없다"며 병영을 나왔고, 심야에 도시 외곽 공장지대의 시민단체 본부에서 군복을 벗은 채 공개 성명을 발표하였다.
128
129> “우리는 폭정의 방패가 되기를 거부한다. 조국은 위원장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숨 쉬는 시민이다.”
130
131이 사건은 단일 병영 이탈 이상의 충격을 주었다. 국방부는 급히 사건을 은폐하려 했으나, 같은 날 밤 RBC 송신소 기술진 일부가 비어 있는 주파수로 내보낸 해적방송을 통해 부사관들의 증언과 무기 사진이 전국에 알려졌다. 이는 시민들에게 무장 저항이 실현 가능하다는 상징적 메시지를 던졌고, 무장화의 정당성과 실효성을 입증한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132
13318일 새벽 벨포르 남부 생지구역에서는 청년조가 군수공장에서 전기충격봉과 헬멧, 구급 키트를 확보해 배포했으며, 동시에 구역별 '시민방위조'(Civic Defense Committees)가 조직되기 시작했다. 이들은 방어 진지 구축과 초소 배치, 야간 순찰을 자율적으로 시행했고, 일부 지역에서는 경찰 초소를 점거하고 기물을 몰수하는 사례도 나타났다. 경찰은 점차 중심 시가지에서 철수했고, 일부 지역에서는 치안의 공백을 시민들이 메우는 상황이 되었다.
134
13519일에는 군 내부의 분열이 더욱 가시화되었다. 벨포르 서부에 주둔한 제7보병사단 기갑지원대대 제3중대는 병기고에 접근하려는 헌병의 출입을 거부하고 병영을 봉쇄한 채 장비를 봉인하였다. 이때 발표된 익명의 장교 성명서는 다음과 같았다.
r4
136
137> “국민이 분노하는 이유를 질문하지 않고, 그 분노에 총을 겨누는 자는 군이 아니라 용병이다. 우리는 군인이며, 조국은 국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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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위기감을 느낀 국가비상위원회는 수도 방어선에 특수부대와 장갑차 부대를 집중 재배치하였다. 그러나 시민들은 이미 정보망을 통해 이를 파악하고 있었고, 20일을 전후해 벨포르 시내에는 진지와 연합 초소, 연막탄 제작소가 마련되었다. 민간 총기 소지가 합법인 루이나에서 민간 소총을 자동 사격이 가능하도록 개조하는 작업장도 곳곳에 들어섰다. 일각에서는 "이제 혁명은 노래가 아니라 지도와 탄약 위에서 논의된다"는 말까지 돌았다.
140
141=== 10월 24일, 총봉기 ===
14210월 23일 밤 벨포르 시청 지하에서 각 지역 시민방위조와 노동조합, 학생 대표, 군 이탈 장교들이 모여 '시민혁명군 총지휘부'를 결성했다. 총지휘부는 24일 오전 6시를 기해 전국 총파업과 함께 계엄사령부 시설에 대한 무장 점거에 들어간다는 「10.24 행동 지침」을 채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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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24일 아침 철도와 항만, 발전소 노동자들이 일제히 작업을 멈추었고, 벨포르·롱비치·크레테·콜마르에서 시민군이 계엄분소와 방송 송신소, 경찰서를 차례로 점거했다. 롱비치에서는 정오 무렵 해군기지 경비대가 시민군에게 정문을 열었고, 벨포르에서는 오후 들어 RBC 본사가 시민군의 손에 넘어가 군정 수립 이후 처음으로 군정이 아닌 목소리가 정규 주파수로 방송되었다. 혁명의 이름은 이날에서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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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 폭격 명령과 군부의 이탈 ===
1471980년 10월 25일 전국의 무장 저항이 최고조에 이르자, 국가비상위원회 위원장 알렉산더 모로는 정권 수호를 위한 최후의 수단으로 벨포르와 주요 도시에 대한 제한적 공군 폭격을 지시하였다. 이는 군 내 일부 참모들과 비밀리에 논의된 계획으로, '중추시설 파괴'를 명분으로 시민군이 점거한 벨포르 시청 광장, 롱비치 도심 전철 통제소, 크레테 방송 송신탑 등을 타격 대상으로 지정한 것이었다.
148
149그러나 이 명령은 공군 내부에서 즉시 거부당했다. 공군작전사령부 산하 제5항공여단장 베르나르 그레몽(Bernard Grémont) 소장은 "조국의 도시 위에 폭탄을 떨어뜨리는 일은 국민이 군복을 입힌 자가 할 일이 아니다"라며 명령 이행을 거절하고 항공기 출격 대기령을 무기한 연기하였다. 일부 참모진은 출격을 종용했지만, 조종사 다수가 "무장 시위대에는 가족과 친구가 있다"는 이유로 출격 거부 서명을 공동 제출했다.
150
151몇 시간 뒤 [[미합중제국]]의 수도 직할 외교안보위원회는 루이나 주재 외교 채널을 통해 모로에게 직접 경고성 외교 각서를 보냈다. 각서는 "민간인에 대한 항공무기 사용은 국제법상 전쟁범죄이며, 루이나 정부가 이를 감행할 경우 즉각적 외교 단절, 대루이나 제재, 군사적 대응을 포함한 모든 수단을 고려할 것"이라고 명시하였다. 2년 전 군사반란을 방관했던 미합중제국도 동맹국의 수도가 자국 공군의 폭격을 받는 사태까지는 감수하지 않았던 것이다.
152
153이 경고는 사실상 최후통첩에 가까웠고, 군 상층부에 극심한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국방참모총장은 위원장과의 비공개 회담 직후 "군은 조국을 보호하지, 권력을 보호하지 않는다"는 문건을 남기고 사퇴하였다. 이날 오후 수도권 주요 부대 지휘관 상당수가 출동 명령을 거부하는 쪽으로 입장을 바꾸었는데, 그 가운데에는 2년 전 10.10 반란에 가담했던 장성들도 있었다. 위원장실 내부에서도 항명 움직임이 포착되었으며, 일부 경호 간부들은 모로의 거처를 외부와 격리하고 통신을 차단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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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모로의 폭격 명령은 이처럼 군 내부의 조직적 항명과 국제사회의 즉각적 경고로 좌절되었고, 이는 정권의 고립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기록된다. 이 무렵부터 정권 붕괴는 시간 문제로 인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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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 모로 체제의 몰락 ===
15810월 26일 벨포르 일대는 새벽부터 긴장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전날 밤부터 시민군과 군 이탈 병력이 연합하여 도심 접근로를 차례로 장악했고, 대통령궁을 방어하던 모로의 마지막 충성파 부대는 점점 고립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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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모로의 마지막 방어선은 벨포르 중심부에서 플로르 강을 건너 대통령궁으로 이어지는 루메르 가도(Lumer Road)를 따라 배치되어 있었다. 이 방어선은 계엄사령부 직할 경비대 잔여 병력과 헌병대, 충성파 간부들의 경호 인력 등으로 구성되었으며, 전차 2대와 장갑차 4대, 중기관총 진지, 대전차포 진지와 지뢰까지 동원된 최후의 방벽이었다. 전날 밤 위원장실 군사보좌관은 이 방어선을 중심으로 수도권 전역에 통행금지 재선포와 비상경계 명령을 내렸지만, 시민들은 이미 두려움을 잃은 지 오래였다.
161
162오전 3시 30분 크레테와 롱비치에서 도착한 시민군이 루메르 가도 동편을 따라 벨포르 중앙역 방향에서 진입을 시작했다. 이들은 전날 저녁 제7보병사단 이탈 병력과 합류한 상태였고, 일부 차량은 장갑판을 덧댄 간이 무장 차량이었으며, 후방에는 의용 간호대와 통신조까지 배치되어 있었다. 포화는 없었다. 정권의 잔여 병력은 발포 명령을 받지 못한 채 방어선을 지키고 있었고, 대부분은 머뭇거리며 지휘관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163
164오전 4시 15분경 시민군은 루메르 가도 동쪽의 초소 2개를 무혈 점거하였고, 헌병대 일부는 총기를 내려놓은 뒤 도주하거나 체포되었다. 같은 시각 대통령궁 서편 도미니크 교차로에 배치된 충성파 병력은 3분간 경고사격을 했으나, 연막탄과 확성기를 이용한 시민군의 설득전에 휘말려 사상자 없이 무장을 해제하고 항복하였다. 이 시점부터 대통령궁은 사실상 포위되었으며, 정권의 공식 통신망은 모두 끊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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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오전 5시 40분 시민혁명군 총지휘부는 대통령궁 진입을 최종 승인하였고, 제7보병사단 이탈 병력의 장갑차 2대와 시민군 300여 명이 주축이 되어 진입 작전이 시작되었다. 이들은 대형 확성기로 "루이나는 국민의 것이다!"라는 구호를 송출하며 궁 성문으로 접근했다. 대응 사격은 없었다. 경비병들은 출입문을 열고 백기를 든 채 항복 의사를 표시했으며, 일부는 군모를 벗고 "살고 싶다"고 외쳤다.
167
168오전 6시 45분 대통령궁 지하 벙커에서 모로는 무장한 시민군과 이탈 장교 2명에게 체포되었다. 그는 밤새 벙커에 틀어박혀 통신기를 두드리고 있었으며, 체포 당시 반쯤 탈진한 상태였다고 전해진다. 경호를 맡은 헌병 3명은 저항 없이 권총을 내려놓았고, 모로는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은 채 연행되었다. 벙커 안에서는 전날 오후 작성된 "적들은 광기 속에 있다. 나의 죽음으로 조국을 구할 수 있다면…"이라는 자필 메모가 발견되었다.
169
170오전 7시 10분경 모로를 태운 호송 차량이 대통령궁 정문을 나서던 중, 정문 앞에 모여 있던 무장 시민 일부가 차량을 가로막고 총격을 가했다. 모로는 뒷좌석에서 여러 발을 맞고 현장에서 사망했으며, 호송하던 이탈 장교 1명도 중상을 입었다. 총지휘부는 즉시 사살을 지시한 적이 없다고 발표했으나, 사격에 가담한 인원은 끝내 특정되지 않았다.
171
172정오가 되기 전 시민군이 장악한 방송사들은 '''“모로 사망 – 시민혁명 완전 승리”'''라는 긴급 자막을 일제히 송출하였다. 벨포르 시청 광장에는 20만 명이 넘는 시민이 다시 모여들었으며, 노인과 어린이, 노동자와 학생이 한목소리로 "우리는 무릎 꿇지 않았다!"고 외쳤다. 그날 저녁 시민위원회는 국가비상위원회의 해체와 임시정부 수립을 선언하고, 헌법 복원 절차의 개시를 약속하였다.
173
1741978년 10.10 군사반란으로 시작된 2년간의 군정은 이렇게 시민의 손에 무너졌다. 역사학계는 이날을 "정권 붕괴의 날"이 아니라 "주권 회복의 날"로 기록한다.
175
176== 이후 ==
177=== 임시정부와 벨포르의 봄 ===
178임시정부는 10월 27일 비상계엄을 해제하고 정치범을 석방했으며, 언론 사전 검열을 폐지하고 정당 활동을 재개시켰다. 군정기의 공식 명칭이던 「10.10 구국거사」도 이때 폐기되었다. 혁명 직후부터 제4공화국 출범까지 이어진 이 해빙 국면을 [[벨포르의 봄]]이라 부른다. 가을에 시작된 국면이 '봄'으로 불린 것은 계절이 아니라 해빙을 뜻하는 이름이기 때문이다.
179
180이행기의 주도권은 혁명을 이끈 시민위원회가 아니라 [[리처드 앨런 베인브리지]]의 [[민주연합(루이나)|민주연합]]에 돌아갔다. 베인브리지는 혁명 기간 내내 거리 투쟁과 거리를 두었다. 10월 10일 이후 민주연합이 낸 성명은 "질서 있는 민정 이양"을 촉구하는 데 그쳤고, 24일 총봉기에는 "무장은 또 다른 독재를 부른다"며 반대했다. 그가 혁명 지지를 공식 선언한 것은 공군의 폭격 거부와 미합중제국의 경고가 알려진 25일 밤이었다.
181
182그러나 혁명이 끝나자 상황은 달라졌다. 시민위원회와 임시시민의회는 거리의 권위는 있었으나 전국 조직이 없었고, 군정 아래에서 등록 절차를 거쳐 지부망을 갖춘 정당은 사실상 민주연합뿐이었다. 베인브리지는 군정 잔재 청산과 치안 재건을 내걸고 이행기 정국을 주도했으며, 그해 말 헌정이 회복되면서 제25대 대통령에 취임해 [[제4공화국(루이나)|제4공화국]]을 출범시켰다. 혁명의 과실을 혁명에 가장 늦게 합류한 사람이 거둔 셈이었다.
183
184헌정 회복 직후에는 군정기의 폭력에 대한 반성에서 나온 조치들이 이어졌다. 군정기의 철거와 강제퇴거에 대한 반성에서 [[주거권 보장법 (루이나)|주거권보장법]]이 제정되었고, 정보기관에 대한 의회 정보위원회의 감독과 정보감찰관 제도가 도입되었다. 1981년에는 해산되었던 학생회가 부활하고 해직 교원이 복직했으며, [[정보기관 조사위원회]]가 구성되어 군정기와 그 이전의 정보기관 활동을 조사했다.
185
186=== 사후재판과 주요 종사자 재판 ===
1871981년 「국가비상위원회 관련 행위자 처벌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었다. 이 법은 피고인이 사망한 경우에도 공소를 유지해 유죄 여부를 확정할 수 있도록 하는 특례 조항을 두었는데, 혁명 당일 사망한 모로를 법정에 세우기 위한 것이었다.
188
189중앙대법원 산하 특별재판부는 같은 해 모로에 대한 사후재판에서 내란수괴와 살인교사 혐의를 유죄로 확정하고, 계급 박탈과 재산 몰수, 국립묘지 안장 불허를 선고했다. 사망자를 상대로 한 형사재판이 형사법의 기본 원칙에 어긋난다는 위헌 논란이 있었으나, 헌정 회복의 상징성 앞에서 크게 문제 되지 않았다.
190
191이어 내란 주요 종사자들에 대한 재판이 열렸다. 대성당 포위 작전 지휘관, 에드먼드 조이 사건과 나보레 사건의 발포 지휘 계통, 폭격 계획에 관여한 참모, 계엄사령부 핵심 참모 등 31명이 기소되어 27명이 유죄 판결을 받았다. 사형 3명, 무기징역 5명이 포함되었으나, 1983년 제5공화국 출범 특별사면으로 사형은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고 대부분은 1980년대 후반까지 석방되었다.
192
193재판은 모로와 그 측근에서 멈추었다. 10.10 반란의 원 가담자 다수는 혁명 마지막 이틀 동안 출동을 거부한 것이 면죄부가 되어 기소되지 않았고, 오히려 제4·5공화국의 군 수뇌부로 남았다. 이들에 대한 재판은 제6공화국 들어 1996년에야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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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wiki style="border: 1px solid gray; border-radius: 5px; background-color: #F2F2F2,#000; padding: 12px"
196상세 내용은 [[10.10 군사반란]] 문서 참고.}}}
r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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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
198== 평가와 의의 ==
r5
199=== 평가 ===
r11
20010.24 시민혁명은 루이나 현대사에서 가장 급진적이고 결정적인 정권 전복 사건으로 평가된다. 이는 단순한 시위나 정치 개혁 요구가 아니라 전국적 봉기와 무장투쟁을 통해 이루어진 시민 주도의 무장혁명이었으며, 그 과정에서 루이나 사회 전체가 정권과 실질적인 전쟁을 치렀다. 수많은 시민이 자발적으로 무기고를 점거하고 군 병력과 대치하며 직접 정권의 심장부로 향한 이 사건은 '정권은 힘으로 무너뜨릴 수 있다'는 명제를 실현한 역사적 사례로 기록된다.
201
202무장 시민과 이탈 군인들이 연합하여 대통령궁을 포위하고 수도 전역을 장악해 정권을 붕괴시킨 10월 26일의 장면은, 루이나 국민들에게 '권력은 국민의 것'이라는 공화주의의 핵심 원칙을 실체적으로 증명한 날이었다. 특히 이 혁명은 외부의 직접적 군사개입 없이 국내 시민과 군 내부의 도덕적 항명, 그리고 무장 봉기의 결합으로 완성되었다는 점에서 유례가 드문 시민군 중심의 혁명으로 평가된다.
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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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4=== 의의 ===
r11
20510.24 시민혁명이 남긴 가장 본질적인 유산은 루이나의 정치 권력자들에게 "정권은 언제든 시민 앞에서 무너질 수 있다"는 경계심을 뿌리내리게 했다는 점이다. 이후 루이나의 정치 엘리트와 군 수뇌부는 "시민들이 다시 무장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는 인식을 갖게 되었고, 이는 실질적인 억제력으로 작용했다.
206
207혁명은 제도에도 흔적을 남겼다. 계엄 권한의 헌법적 제한과 고위공직자 탄핵 제도가 제4공화국 헌법에 들어갔다. 다만 군의 정치 개입을 명문으로 금지하는 조항은 1989년 제6공화국 헌법에 가서야 들어갔다. 혁명이 만든 탄핵·파면 제도가 9년 뒤 처음으로 쓰인 대상이 혁명의 과실을 거둔 베인브리지 자신이었다는 점은 자주 지적되는 역설이다.
208
209혁명은 [[검은 10년]]의 종언으로도 받아들여진다. 무장조직들은 군정에 맞선다는 명분을 잃었고, 청북전쟁 제대군인과 반전 학생이 결성한 [[10월 전선]]은 1980년 12월 스스로 해산했다. 검은 10년의 무장조직 가운데 자진 해산한 유일한 사례였다.
210
211오늘날까지도 루이나 정치권에서 자주 회자되는 문장 "광장은 총을 들었던 적이 있다"는 이 혁명의 본질을 요약하는 표현으로 남아 있다.
212
213=== 한계와 논란 ===
214혁명이 세운 헌정은 오래 온전하지 못했다. 베인브리지 정부는 군정 잔재 청산을 내걸었으나 10.10 가담자들이 남아 있는 군 수뇌부와 손을 잡았고, 1983년 개헌으로 제5공화국을 연 뒤에는 권위주의적 통치로 기울었다. 이 흐름은 1989년 그의 3선 시도가 부른 [[루이나 헌정 위기|헌정 위기]]로 이어졌다.
215
216혁명기의 보복 폭력도 오랫동안 다루어지지 않은 문제로 남았다. 모로의 사살은 끝내 책임자가 특정되지 않았고, 10월 25일부터 27일 사이에는 벨포르와 브라노르에서 2년 전 사망한 [[비달 파브르]]의 유족이 무장 군중에게 살해되는 일도 있었다. 제4공화국이 혁명을 자신의 정통성으로 삼은 이상, 혁명 측의 폭력을 공식적으로 조사하는 일은 정치적으로 금기에 가까웠다.
r1

(새 문서)
217
218== 대중매체에서 ==
r11
219* 《백색의 밤》(1984) — "공군 폭격 명령을 거부한 날"이라는 대사로 혁명의 전개를 암시한다.
220* 《황혼의 유산》(1984) — 주인공이 국가기록보존소에서 '1980.10.24' 관련 문서를 열람한다.
221* 《10월의 총성》(1985) — 제5공화국 시기에 제작된 보수적 선전 영화로, 성당 진압 장면을 영웅적으로 재현했다.
222* 《기억의 광장》(1989) — 배경 도심 벽면에 "10.24 시민해방전선" 그래피티가 등장한다.
223* 《무너진 궁전》(1991) — 대통령 연설 장면에서 "우리는 10월 24일을 잊지 않을 것이다"라는 대사가 나온다.
224* 《광장은 총을 들었는가》(1996) — 증언록 중심으로 구성되었으며, 성당 포위 장면이 삽화로 수록되어 있다.
225* 《청동의 계절》(1997) — 뉴스 앵커가 "오늘은 10.24 시민혁명 17주년입니다"라고 보도한다.
226* 《라디오 벨포르》(2001) — 극 중 라디오 방송에서 혁명 21주년 기념방송을 진행한다.
227* 《종소리는 멈추지 않는다》(2002) — 성당 앞에서 헌화하며 "아버지가 여기 계셨어요"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228* 《성당의 밤》(2002) — 두 인물이 성당 포위 중 대화를 나누며 군정의 폭력을 자각한다.
229* 《광장의 바람》(2010) — 수업 중 교사가 "벨포르 대성당 항쟁은 민주주의의 불꽃이었다"고 설명한다.
230* 《이름 없는 날들》(2011) — 술자리 장면에서 인물 하나가 "10.24 때 아버지가 사라졌지…"라고 말한다.
231* 《마크맨》(드라마, 2015) — 용의자가 남긴 유서에 "그 총성은 아직 귓가에 맴돈다"라는 10.24 관련 문장이 등장한다.
232* 《희망의 저편》(2019) — 주인공의 아버지가 "나는 성당 안에 있었어"라고 고백한다.
233* 《레지스탕스: 제7의 밤》(게임, 2019) — 배경 벽화에 "우리는 10월의 불꽃을 기억한다"는 문구가 들어가 있다.
234* 《공식기록 없음》(팟캐스트, 2020) — "벨포르 성당에 갇힌 아이들" 에피소드 전체가 10.24를 다룬다.
235* 《우리는 공화국을 봤다》(2022) — 시민 12인의 증언 가운데 7명이 성당 포위 생존자임을 밝힌다.
236* 《에델의 노래》(음악 앨범, 2022) — "성당은 불타고, 어머니는 울었다"는 가사로 혁명을 언급한다.
237* 《국가의 그림자》(2023) — 해킹한 정보 문건에 "10.24 시민봉기 이후 통제체계 구축"이라는 문구가 있다.
238* 《도심의 밤은 꺼지지 않는다》(2024) — 뉴스 배경 자막에 "10.24 시민혁명 44주년, 진실은 어둠 속에"가 삽입되어 있다.
r1

(새 문서)
239
240== 관련 문서 ==
r11
241* [[10.10 군사반란]]
242* [[12.6 사태]]
243* [[국가비상위원회]]
244* [[알렉산더 모로]]
245* [[비달 파브르]]
246* [[벨포르의 봄]]
247* [[리처드 앨런 베인브리지]]
248* [[민주연합(루이나)]]
249* [[제4공화국(루이나)]]
250* [[검은 10년]]
251* [[스틸워터 계획]]
252* [[루이나 헌정 위기]]
253* [[루이나/역사]]
254